조주(趙州)의 방하착(放下着)에서 시작해본 생각의 끈

하늘 No.34 [Essay] 4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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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趙州)의 방하착(放下着)에서 시작해 본 생각의 끈

조주(趙州)의 방하착(放下着) - 보운화

가을 일기가 순탄치 않습니다. 여름 장마로 인해 늦게 심은 무 배추가 제대로 자라기도 전에 지난번의 기습한파로 시들었다가 겨우 힘을 찾았는데 또 어제의 급강하한 기온으로 모양이 아닙니다. 이번 동안거에는 무 배추를 모두 사다가 겨울 김장을 마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도 수행자에게는 자칫 집착으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아 오늘은 조주(趙州) 선사(禪師)의 방하착(放下着) 이야기나 한번 해볼까 합니다.

9세기경 중국에 엄양(嚴陽)스님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인품이 매우 훌륭해서 '엄양존자’라고 불렀습니다. 엄양존자가 어느 날 선승(禪僧) 조주 선사(778~897)를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스님,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一物不將來時 如何)?"

당시나 지금이나 '집착을 버리라’는 법문을 많이 합니다. 집착을 버려야 부처가 된다고…, 그의 질문에 조주화상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놓아 버려라(放下着)."

'방하(放下)’는 '내려놓다.’ 또는 '놓아 버리다.’는 뜻이고, 착(着)은 명령형인 '방하’를 강조하기 위한 어조사입니다. '방하착(放下着)’은 '집착하지 말라.’ 또는 '집착하는 마음을 놓아 버리라.’는 뜻으로 일반적인 선어(禪語)인 동시에 화두(話頭)입니다.

처음부터 한 물건도 가지고 온 것이 없는데 무엇을 놓아 버리라고 하는 것인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엄양존자는 재차 질문했습니다.

"이미 한 물건도 가지고 온 것이 없는데 무엇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다시 짊어지고 가거라(擔取去)."

조주화상은 그를 완전히 코너로 몰아붙였습니다. 엄양존자의 질문과 조주선사의 대답을 보면 두 스님 사이의 문답은 거의 막다른 골목까지 와 있는 느낌입니다. 내려놓을 것이 없다는데 도로 짊어지고 가라고 했으니, 엄양존자는 진퇴양란에 빠진 것입니다.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그는 큰절을 하고 나왔을 것입니다.

이 문답에서의 핵심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방하착’이지만, 재미있는 대목은 "이미 한 물건도 가지고 온 것이 없는데 무엇을 또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이냐?"는 엄양존자의 신경질적인 질문이고, 다음은 "그렇다면 도로 짊어지고 가라."고 하는 조주의 악담 같은 대답입니다.

한번 조근 조근 풀어 봅시다. 내려놓을 것이 없다는데 조주선사는 무엇을 다시 짊어지고 가라고 한 것일까요? 엄양존자는 모두 방하착했다고 생각했지만 백전노장인 조주선사가 보기엔 여전히 집착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한 물건도 가지고 온 것이 없다.’고 하는 그 생각(관념)이었습니다. 그 생각을 여전히 놓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주화상이 그를 향하여 '방하착(放下着)하라’고 한 것은 바로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그 의식마저 놓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식까지 버린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무집착이고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일물(無一物)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남아 있는 한 그는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만일 어떤 훌륭한 사람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훌륭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아직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로 훌륭한 사람은 자신이 훌륭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훌륭한 것입니다.

이 선문답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또 다른 이면을 엿볼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엄양존자가 조주화상을 찾아가서 물을 때에는 이미 자기 자신은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났으므로, 이 정도면 공부가 다 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가지고 물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짜고짜로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에는 어떻습니까(一物不將來時 如何)?"하고 물은 것입니다.

여기서 '여하(如何)’는 수행의 정도에 대해서 평해 달라는 뜻입니다. 즉 '이만하면 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조주선사가 보기에는 여전히 무일물(無一物)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조실(祖室)은 이런 안목(眼目)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물건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一物不將來時 如何)"의 원형은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다)’입니다. 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은 육조(六祖) 혜능선사의 게송(偈頌,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 심여명경대(心如明鏡臺)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에서 나온 말인데, '한물건(一物)’이란 마음 즉 번뇌 망상을 가리킵니다. 번뇌 망상 속에는 집착심. 근심. 걱정. 불안 등 모든 중생적인 분별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선승들의 선문답(법거량)은 아주 박진감이 넘쳐흐릅니다. 순간순간이 일격의 순간입니다.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다가는 언제 쏜살같은 언어의 방망이가 날아올지 모릅니다. 그야말로 사건 25시입니다.

방하착(放下着)은 무소유(無所有)를 상징합니다. 물질적인 것은 물론이고 어떤 고정관념이나 집착. 선입견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물질을 소유하는 것은 여유가 있어 좋기는 하지만 상실(喪失)에 대한 불안감은 마음의 평온을 해칩니다.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계속 무거운 짐을 지고 서있는 상태입니다. 참으로 행복한 수행자가 되고자 한다면 무소유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혹 사랑하는 사람만은 남겨 두어야 하는 건가?

소유하고 소유하지 않음이여!
모기가 무쇠소를 무는 것 같음이라.

반야진공(般若眞空)이 드러나면,
두두(頭頭)와 물물(物物)에 그림자가 없거늘!

조주는 다시 무엇을 도로 가져가라고 했을까?

2010.11.03.염화당 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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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10.11.03. 17:16
한참을 읽어오며 많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루 이틀 더 천천히 읽고 생각해보고 다시 답글 달겠습니다.
좋고 깊은 글 감사드립니다. ^^ 꾸뻑..
추운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길~



조주(趙州)의 방하착(放下着)에서 시작해본 생각의 끈|+ 이야기 나눔 하늘 2010.11.04. 06:15 사실 불교나 기독교나 여타 종교에 몸 담은 적도 없고 그리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한 저로써는 뭐라 글 달만한 자격도, 지식도 없지만 그저 위의 글을 계기로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었습니다. 신중한 고민 끝의 글도 아니니 가벼이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조주는 다시 무엇을 도로 가져가라고 했을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네가 무언가를 가져 왔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로 느껴집니다. 엄양이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라고 했고 조주는 비움에 대한 집착을 가져 왔구나 라고 했으며 엄양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엇도 안 가져왔다니까요? 한 대화에서 조주는 "넌 무언가(비움의 집착)를 가져왔다니까 !!" 라고 대답 한 게 아닌가 하고 일단은 짐작해 봅니다. 여기까지는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인데... 저는.. 마음은 그릇 같은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것들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담긴 모든 것을 비우려면 그릇을 뒤집는게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지만 그릇 자체를 움직이는것이 불가능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차선책은 그릇에 어떤 것을 채워서 이미 마음 그릇에 담긴 것을 차고 넘치게 해서 버리는 것인게 결국 완전히 비우는 것은 아니겠지요. 위의 조주의 글에서 있는 것을 비우기 위해 새롭게 채우는 그 무엇이 비움에 대한 집착이든 혹은 다른 것이든 무엇이라도 내용물이 바뀌는 것일 뿐 마음이 비워진 것은 아니다.. 이런 맥락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그릇을 뒤집어 쏟고 나서 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것이 들이 차게 될 것이고 그때마다 마음을 뒤집는 모양새도 우습고.. 그렇다고 새로운 것들이 들어차지 않는 곳에서 숨어서 덜덜 떨고 있는 것도 피신일 뿐이고 새로이 들어오지 못하게 뚜껑을 덮는 것도 그렇고 ... 항상 뒤집어 놓아 두는 것은 더 우스운 일 같습니다. 항상 뒤집어 놓아 어떤 것도 그 그릇에 담기지 않게 만들어 둔다면 왜 애초에 마음이란 게 이런 그릇 모양이었을까? 그냥 평평한 모양이면 담길 건덕지도 없을 것이고.. 애초에 뒤집혀 있거나 입구가 막혀 있다면 모양이 어찌 되었건 마음에 담기고 쌓일 일도 없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집착이 세상에 이리도 많이 떠다니고 마음은 그걸 담기기 쉬운 모양새라면 담지 말고 비워야 할 이유보다는 그냥 담기게 두는 쪽이 더 적절한 답에 가까운 게 아닌가 하는 건방진 생각을 해 봅니다. 비우라거나 담지 말라는 의견보다는 마음이라는 그릇이 담긴 내용물에 스미거나 변형되지 말라는 이야기 인건가? 라는 의문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미역국을 담은 그릇이 미역 국물에 녹아들면 결국은 그릇에 구멍이 나겠구나.. 언젠가는 애초에 그릇 역활을 못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겠다. 이렇게 조급스런 결론을 내어 봅니다. 주신 글과는 관계가 별로 없는 글일 수 있는데 그냥 연상되는 장면이 있어서 이런 대화록을 혼자 상상해 봅니다. ......................... 제자 : 저는 모든 것을 비우고 왔습니다. 스승 : 너는 아직도 마음에 담긴 것이 있구나. 제자 :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이 담겼다 그러십니까? 스승 : 네가 모든 걸 비웠다면 왜 나를 찾아 왔느냐? 왜 내게 묻느냐?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게냐? 최소한 내가 보기에 너의 마음속에는 비워야겠다. 비워진 채로 있겠다 라는 집착과 내 마음이 비워져 있는게 맞는 건가 하는 의심과 그것을 나에게 확인해 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것들을 모두 비우고 가라. 제자 : 그것들을 모두 비워내도 그 그릇인 마음이 남는데 그것은 어찌합니까? 마음을 비워내는 거야 그렇다 치고 마음 그 자체는 어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스승 : 그 마음이란 건 가지고 있어야겠지. 제자 : 그렇다면 그 마음 그릇에 무엇이든 쌓이게 마련인데 이를 어쩝니까? 스승 : 그렇다면 그것들을 그냥 마음 그릇에 담고 가거라. 제자 : 어디로 가란 말인가요? 스승 : 네 마음이 이야기 하는 곳이겠지. 네 마음 그릇 속에 담긴 것들이 이야기 하는 곳이 아니라... 제자 : 내 마음이 무엇이라 이야기 하는지 잘 들리지 않습니다. 스승 : 그거야 내 마음 그릇에 담긴 것들이 많고 찰랑 거리고 시끄러이 구니 못 들었던 것이겠지. 네가 잠시라도 마음 그릇에 아무것도 안 담겨 있을 때가 있었다면 그때는 마음만 있는 것이니 잠시라도 잘 들릴 가능성이 있겠지. 일단 마음의 이야길 들었다면 그 이후야 마음 그릇에 뭐가 담기든 무슨 상관이랴? 처음부터 마음이랑 이야기 하는 게 목적이었으니... 들어봤으면 된 것이지. 제자 : 그래도 항상 마음의 이야길 들으면 좋을 것 아닙니까? 스승 : 웃기는 구나. 그 이유나 혹은 언제나 이야기 할 수 있는 방법 역시 마음과 이야기 할 수 있을 때 마음이 알려 주는 것 중에 하나일터인데.... 왜 그걸 내게 묻느냐? 내가 너의 마음이냐? 제자 : 그렇다면 항상 마음과 이야기 할 수 없는 이 세상의 모양새가 어떤 이유가 있단 말씀인가요? 스승 : 이 세상이 이런 모양이라면 어떤 이유가 있다는 게 비교적 합리적으로 보이는 대답으로 들리지 않느냐? 제자 : 이해할 수 없습니다. 스승 :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벗어나지 못하고 집착과 번뇌에 안고 있다면 그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그러니 그런 모양일거 아니냐? 제자 : 하지만 저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 이리 노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스승 : 나는 내게 왜 그 집착과 번뇌를 벗어버리려 하느냐 라고는 묻지 않겠다. 그것보다 더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지. 왜 세상에 집착과 번뇌가 많은 모양새로 있으냐 라는 것이다. 그런 모양인 것도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 아니겠느냐? 제자 : 그렇겠지요 스승 : 만일 집착과 번뇌가 있어야만 하는 정말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 벗어버리려는 네 행동은 어쩜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 제자 : 그야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스승 : 마지막으로 묻자. 이 크고 오랜 시간이 쌓인 이 세상이 이런 모양이다. 이유가 있을것 같냐? 그런 것 없이 우연이 이렇게 되었을 것 같느냐? 제자 : 두렵고 두렵습니다. 스승 : 하하~ 왜 세상을 이렇게 번뇌와 집착과 고통에 가득 차게 만들어진 이유로 악마라도 있다고 하고 싶으냐? 만일 그렇다면 악마가 가장 착한 인물 일세~ 수 많은 수도자에게 수행의 타당한 이유를 쥐어주는 인물이 아니더냐. 번뇌가 있어야만 하는 흔들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 보다야 얼마나 좋은 결론이냐? 제자 : 그렇다면 악마가 있는 것입니까? 스승 : 답은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그 오랜 세월동안 이 큰 세상을 번뇌와 고통으로 가득 채울 능력의 악마란 없다. 있다손 치더라도 그 이름은 차라리 신이라 그러는게 나을것 같긴 하다. 제자 : 두렵지만 묻고 싶습니다. 왜 저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번뇌와 집착에 고통받게 태어나고 살고 있는 것입니까? 스승 : 그 이유가 타당한 것이라면 너는 그간의 모든 수행을 포기하고 다시 번뇌와 집착과 고통 속으로 돌아갈 수 있으냐? 버릴 수도 있는 능력을 가지도 있을때에도? 제자 : 타당하다면 그러해야 겠지요. 스승 : 최소한 한가지는 확언할 수 있겠다. 세상에 번뇌가 있으니 번뇌를 벗을 수 있는 것이다. 없는 무엇을 없애거나 버릴 순 없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세상에 법을 깨 닫고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인물이 다시 번뇌와 집착을 뒤집어 쓰는 것을 본적 있느냐? 제자 : 없습니다. 스승 : 틀렸다. 너는 세상을 창조한 창조신이든 이미 창조된 것에 질서를 부여한 조화신이든 그 존재가 있다면 그가 번뇌를 벗지 못해 그가 구성한 세상에 번뇌가 있다고 보느냐? 제자 : 아닙니다. 스승 : 그 존재는 번뇌를 벗어났지만 번뇌를 존재케 했다. 혹은 전까지 없었던 번뇌를 창조했다. 설령 악마가 번뇌를 만들었다손 치더라도 그 역시 처음에는 없었을 것이고 무엇인가가 그를 존재케 했을 것이다. 제자 : 그렇지요. 스승 : 만일 네가 그 존재와 비슷한 수준에 이르른다면 너 스스로의 번뇌뿐만 아니라 세상의 번뇌를 모두 다 없애버리지 그러느냐? 제자 : 아니지요. 그만한 존재가 그리 했다면 이유가 있겠지요.. 스승 : 너는 내가 할 대답을 해 주고 있구나. 제자 : 아... 스승 : 앞서 질문에 모든 것을 벗어난 인물이 다시 번뇌와 집착을 뒤집어 쓰는게 있냐고 물었다. 대답은 이러하다. 있을지 없을지 모를일이지만 설령 있었다손 치더라도 어찌 알려질 수 있겠느냐? 그 혼자만 알 뿐이지. 그 인물이 알리지 않았다면 알리지 말아야 했을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또한 알려졌다면 어찌 사람들이 법 아래 모여들겠느냐? 제자 : ... 스승 : 정리하면 이리 된다. 세상의 모습은 현재와 같이 이러하다. 고통이든 번뇌든.. 어찌 되었건 이런 모습니다. 슬쩍 보기에 우리는 이 세상의 원래 모습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은 너무나 크고 짜임새 있다. 아무리봐도 우연이라 하기 어렵고 어떤 의지나 이유가 있어야 그럴듯해 보인다. 우리의 수행은 이 자연스러운 모습에 반하여 역행하는 모양새이다. 그러니 이 대답은 너무나도 위험하고 위험한 것이다. 내가 스스로의 마음에게서 들어야 할 대답이다. 왜 애초에 세상은 이런 번뇌가 있는지? 왜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번뇌를 안아야 하는지?? 그리고 왜 벗어야 하는지 역시도... 제자 : 도대체 그 번뇌를 벗어야 할 이유는 있는 것입니까? 스승 : 벗지 말아야 할 이유도 있고 벗어야 할 이유도 있을 것이다. 제자 : 아까 이야기 했던 그 마음이라는것 어찌 된 것입니까? 그 마음이란 것도 놓아야 하는 겁니까? 스승 : 마음을 버리고 나면 너는 어디에 있는것이냐? 제자 : 마음 밖에 또 다른 내가 있는 것입니까? 스승 : 우습구나. 또 다른 내가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쩔거냐? 모르면 모르만한 이유가 있겠지. 제자 : 그런 식이라면 제가 이런 수행에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가 번뇌에 가득차 있다손 치더라도 가득차 있을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스승 : 그렇겠지.. 네 말은 참 맞고도 틀리구나.. 제자 : 스승님이 앞서 하셨던 말씀이 아닙니까? 왜 제 말은 틀리고도 맞다고 하십니까? 스승 : 어허.. 어리석구나. 세상이 왜 이리도 번뇌와 고통에 차 있는 이유를 알아야 벗어나야 할 이유도 알게 될 것이란 말이다. 그리고 너는 그 시점이 되어서야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벗어날지 그냥 세상 모습으로 살지 말이다. 제자 :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스승 : 결국 너는 벗어나기 위해 수행을 하는게 아니라 벗어날지 말지를 선택하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이다. 네 수행의 시작은 번뇌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왜 번뇌가 있느냐에 대한 질문이어야 한단 의미이다. 다시 한번 이야기 하마.. 너는 "선택" 을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란다. 번뇌를 벗을 수 있는 시점이라는것은 번뇌를 안 벗을 수도 있는 시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가 내 앞에 집착을 가지고 왔다면 그 집착을 내 앞에 버리지 말고 고이 안고 가거라. 너는 너의 의지로 집착을 버리는 것만 어렵고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 생각할테지만 네 의지로 집착을 안을 수 있는것 역시 반대편 등산길처럼 같은 꼭대기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정 정상에 이르렀다는 의미는 그 정상에서 다시 내려올지 그곳에 계속 머무를지 선택할 수 있을때라야만 그 등산이 성공적인 것이지 다만 산아래 어떤 것이 무서워 올라와서는 내려가고 싶은데 내려가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라면 그것은 등산이 아니라 다만 도망 온 것일 뿐이다. 나는 너의 수행의 길이 도망이 아니라 등산이길 바란단다.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 네가 스스로의 "선택" 과 "의지" 를 잊지 않아야 한다 - 는 말 그것뿐이노라. 의지가 존재를 부여 함이니 말이다. ......................... [번외 대화편] ------------------------- 스승 : 세상에서 가장 마음대로 되지 않는게 무엇인줄 아느냐? 제자 : ..... ....... 아.. 잠시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스승 : 세상에서 가장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바로 그 "자기 마음" 이니라. 제자 : 하핫... 참 말이 되지 않는 말같은데 맞는 말씀인듯 합니다. 스승 : 그게 뭐 그리 말이 되지 않을게 있느냐? 어쩌면 그것이 가장 단순 명료한 사실이다. 사람의 눈으로 가장 볼 수 없는 곳은 자신의 눈동자 속 아니더냐? 스스로는 스스로에게 어떤 것도 할 수 없고 볼 수 조차 없는 것이다. 네가 너의 봄(Look)을 네 눈이라 생각하면 너는 결코 너의 눈동자 속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너의 봄이 네 눈을 벗어나면 네 눈동자 속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네가 너 자신을 네 마음속에 담긴 그 무엇으로 생각하면 너는 네 마음 그릇에 담긴 것들에 조차도 어찌 할 수 없이 될 것이다. 네가 너를 네 마음이라 생각하면 그제서야 마음그릇에 담긴 내용물들이 보이고 이야기 나눌 수 있겠지만 역시나 그 마음 그릇 자체에 대해선 무엇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네가 그 마음이라는 것에서 벗어나고 거리를 만들 수 있으면 그제서야 너는 네 마음 자체와 대화를 시작 할 수 있을 것이다. 힌트를 하나 주랴? 마음 그릇에 담긴 많은 것들을 비우고자 하지 않느냐? 그릇이 스스로 안의 것들을 비울 수 있느냐? 그릇을 비우는 손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 그것이 너의 손이고 너 자신인 것이다. ............ 마음 안에 담긴 것들은 사실 선택할 수 있고 의지를 가지고 있단다. 마음안에 담긴 것들은 처음에는 너와는 관계없는 것들이었는데 바깥세상에서 너에게로 들어 온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가고 싶어 하는 곳,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집착" 이라고 한다. 너의 마음이 마음에 담긴 것들에 오히려 이끌림 당하는 것을 "번뇌" 라 한다. 마음 역시 언제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언제나 의지를 가지고 있지. 마음은 너를 이루고 있는 일부이다. 최소한 외부의 무엇은 아니겠지. 이 마음의 선택이라면 그것은 최소한 의미는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마음의 선택을 보고 생각할 수 있으려면 너는 이 마음에서 떨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마음에서 벗어나고도 남은 너. 그것이 너 자신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너 자신 또한 의지를 지니고 있지. 너와 너의 마음이 대화하고 합의하고.. 하지만 언제라도 너의 의지는 너의 마음의 의지보다 우월해야 할 것이다. 같은 너의 일부지만 주인과 종이 헷갈릴 수는 없는일 아니냐... ............ 마음안에 담긴 것 이 아니라 네 마음의 선택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면 너는 그제서야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된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의 선택 조차도 원할때면 따르지 않고 반대의 길을 네가 선택할 수 있게 된다는 그때서야 너는 "자신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나마 "마음대로" 라는 단어는 있는데 "자신대로" 라는 단어는 아직 세상에 있지도 않아서 대충 만든것이다. 세상의 처음에 아직 마음조차 만들어 지지 않았을때 세상을 구성한 존재는 세상을 "마음대로" 만든게 아닐것 아니냐? 마음이 아직 없었을테니.. 세상은 그 "존재대로" 만들어 진 것이다. (원채 짧은 지식과 얕은 생각으로 이야기를 풀어갈수록 자꾸만 꼬이는거 같아 여기서 마무리 해얄듯 합니다. 그냥 가볍게 읽고 지나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러셀 10.11.04. 16:08 대단하십니다~^^ 훌륭한 해석이네요~ 약간은 생각이 다른내용이 있긴 하지만 모두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또한 이렇게 정리해낼 수 있는게 훌륭합니다.^^ 하늘 10.11.05. 14:33 에거.. 쑥쓰럽습니다. ^^ 급조해 쓴 글이라 내용이 앞뒤가 안 좀 안 맞는것 같기도 합니다. 그냥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어 아래 올려주신 글을 계기로 제 생각을 함 정리해 볼까 해서 써 본 글인데 좀 부끄럽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꾸뻑.. 뷰렛 10.11.06. 13:38 글을 모두 읽고 합장하고 조용히 물러갑니다...^^ 훌륭하십니다!!! 러셀 10.11.07. 10:56 합장^^; 하늘님은 속세를 떠야 한단 말인가..ㅋㅋ 아니 세속에서 살아도 속세를 떠난분처럼 살고 있는게 맞겠지용...^^; 아무튼 달라~~~ ㅎㅎ 하늘 10.11.07. 16:07 에거거~ 전 세상이 좋아유~
2018.09.20 Written, Edited, Arranged, Produced : 하늘 SkyMoon.info 조주(趙州)의 방하착(放下着)에서 시작해본 생각의 끈 Photo-Image

https://SkyMoon.info/a/Poem/34  

무지할수록 독단적이다 [윌리엄 오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