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시] 아버지와 나 - 신해철

하늘 No.116 [인용] 3936
아버지와 나  - 신해철

아주 오래 전 내가 올려다본 그의 어깨는 까마득한 산처럼 높았다. 그는 젊고 정열이 있었고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나에게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내 키가 그보다 커진 것을 발견한 어느 날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그가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이 험한 세상에서 내가 살아 나갈 길은 강자가 되는 것뿐이라고 그는 이야기했다. 난 창공을 나르는 새처럼 살 거라고 생각했다. 내 두발로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라 내 날개 밑으로 스치는 바람 사이로 세상을 보리라 맹세했다. 내 남자로써의 생의 시작은 내 턱밑에 수염이 나면서가 아니라 내 야망이, 내 자유가 꿈틀거림을 느끼면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기 걸어가는 사람을 보라. 나의 아버지 혹은 당신의 아버지인가? 가족에게 소외 받고 돈 벌어 오는 자의 비애와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린다. 집안 어느 곳에도 지금 그가 앉아 쉴 자리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와 다 커 버린 자식들 앞에서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방법이란 침묵뿐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아직 수줍다. 그들은 다정하게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를 흉보던 그 모든 일들을 이제는 내가 하고 있다. 스폰지에 잉크가 스며들듯 그의 모습을 닮아 가는 나를 보며 이미 내가 어른들의 나이가 되었음을 느낀다. 그러나 처음 둥지를 떠나는 어린 새처럼 나는 아직도 모든 것들이 두렵다. 언젠가 내가 가장(家長)이 된다는, 내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무섭다. 이제야 그 의미를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이 자유롭지 못한 이유가 바로 나였음을 알 것 같다. 이제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후에 당신이 간 뒤에 내 아들을 바라보게 될쯤에야 이루어질까? 오늘밤 나는 몇 년만에 골목을 따라 당신을 마중 나갈것이다. 할 말은 길어진 그림자 뒤로 묻어둔채 우리 두 사람은 세월 속으로 같이 걸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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