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의 포토그래퍼 빌 커닝햄 / 돈은 가장 저렴하고, 해방과 자유가 가장 비싸다
하늘
No.115
3413
2024-09-16
신념의 포토그래퍼 빌 커닝햄 / 돈은 가장 저렴하고, 해방과 자유가 가장 비싸다
=====================
https://oncuration.com/거리-푸른-신사-빌-커닝햄/
FaceBook : Bill Cunningham
https://www.facebook.com/BillCunninghamPhotographer/
신념의 스트릿 포토그래퍼 빌 커닝햄
온큐레이션
https://youtu.be/eX3HZ49zHeM
빌 커닝햄 촬영 모습
https://www.gettyimages.com/photos/bill-cunningham
https://www.facebook.com/dolcissimame.it/posts/pfbid0g6JS6seYWT6buysMhUCcbUyBGXW7j3mdbyo98MdV1Lf3AK4DRfj1unAGf5Vf5j6Al
[사진작가] 빌 커닝햄 (Bill Cunningham)
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Bill Cunningham New York”은 2010년 개봉되어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
- 이하 자료 보존을 위해서 내용 복사 했습니다. 아래의 링크를 이용해서 원문 참조 바랍니다.
신념의 포토그래퍼 빌 커닝햄 / 돈은 가장 저렴하고, 해방과 자유가 가장 비싸다
https://oncuration.com/거리-푸른-신사-빌-커닝햄/
"안나, 여기 봐주세요!"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wintourworld)는 손을 흔드는 포토그래퍼들을 가뿐히 지나친다. 대신 그녀는 가볍게 뒤를 돌아 새파란 프렌치 워크 재킷을 입은 백발의 사진가에게 포즈를 취하고 쇼장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빌을 위해 입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녀의 말대로 전 세계의 패셔니스타와 유명 인사들, 적어도 모든 뉴요커는 새파란 워크 재킷 차림의 노인 앞에 섰다.
빌 커닝햄을 향한 수식은 두 가지다. '뉴욕의 상징'과 '최초의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퍼'. 그는 1960년대부터 2016년, 그가 숨을 거두기 전까지 패션을 유일한 애인으로 두었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인생을 패션에 헌신했다. 그의 이야기가 패션을 사랑하는 또 다른 이들의 영감이 되길 바라며 이 글을 바친다.
---------------------
패션, 일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갑옷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퍼로 잘 알려진 빌은 사실 디자이너로 패션 커리어를 시작했다.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나 한 달 만에 자퇴하고 뉴욕으로 건너가 '윌리엄 제이(William J.)'라는 레이블을 만들어 모자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한국 전쟁 당시 나라의 부름으로 떠난 프랑스 캠프에서도 그의 패션 사랑은 굳건했다. 군 동료들의 부인에게 모자 디자인 주문받으며 사물함에는 각종 패션 매거진으로 채워놓고 휴일에는 패션 갈라, 매장 등을 패션의 본고장 파리에서 경험했다. 그의 군 생활은 파리로의 패션 유학이던 셈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그가 파리에서 경험한 것들을 전부 모자에 불어 넣었다. 패션과 삶은 그에게 하나였기에 과일, 야채, 새 등 모든 것이 디자인의 소재였다. 아방가르드하고 파격적인 디자인에 매료된 '제키 케네디(Jackie Kennedy)', '마를린 먼로(Marilyn Monroe)', '진저 로저스(Ginger Rogers)', '조앤 크로퍼드(Joan Crawford)' 등 아이코닉한 인물들이 너도나도 빌의 모자를 쓰게 된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시대가 빌을 배신한다. 1950년대부터 여성 모자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사그라들기 시작한 것이다. 1962년 패션에 대한 빌의 열정이 담긴 첫 브랜드, 윌리엄 제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늘 그래왔듯, 빌은 패션에 대한 사랑을 지켰다. 포기하지 않는 이에게 기회가 찾아온다고 했던가. 그는 '우먼스 웨어 데일리(Women's Wear Daily)'에서 패션 칼럼을 쓰기 시작할 무렵, 우연히 패션 사진을 찍게 된다. 히피를 시작으로 스트리트 패션을 카메라로 담게 되면서 최초의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퍼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격변과 큰 문제들 앞에 패션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곤 하죠. 그렇지만 패션은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갑옷입니다. 패션은 사라지지 않을 거에요. 그건 문명을 없애는 것과 같아요." 그는 그렇게 패션에 사랑을 맹세했다. 그렇기에 그의 행보는 가차 없었다. 상류층 여성의 패션을 담고자 초대받지 않은 파티에도 몰래 들어가는 일은 부지기수였고, 자신이 찍은 여성들이 우먼스 웨어 데일리에서 비웃는 논조로 편집되자, 망설임 없이 일을 그만두기도 했다.
빌의 사명감은 그의 카메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희한하게 패션쇼장에서 다른 포토그래퍼들과는 달리 프론트로우에서 그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단지 유명해서가 아니다. 보통 패션쇼장에서 포토그래퍼들은 초점 거리가 긴 망원 렌즈를 사용한다. 이렇게 되면 깔끔하고 정석적인 사진이 될 수 있으나, 항상 일정한 먼 거리에서 찍기 때문에 입체적 공간이 압축되고 인물은 고립된다. 빌은 디자이너들이 우리가 그렇게 옷을 보라고 만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시공간 속에서 서로를 앞, 뒤 옆에서 보는 것처럼 패션 사진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인물, 상황, 옷이라는 삼박자를 지키기 위해 그는 어디서나 24mm~35mm의 렌즈의 가벼운 카메라와 함께했다.
---------------------
거리가 말을 걸도록
"최고의 패션쇼는 거리입니다. 이때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것입니다." 빌은 옷이 자본주의의 논리에서 가장 보기 좋은 상품일 때가 아니라 거리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그 옷을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할 때 패션이 살아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따라서 패션 브랜드, 패션쇼의 컬렉션을 분석하여 트렌드를 예측하기보다는 주로 현실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입는지 파고들었다.
그렇게 빌은 뉴욕 타임즈의 온 더 스트리트 섹션에서 약 40년 동안 1백만 달러에 달하는 가치의 아카이브성 칼럼을 작성했다. 그는 맨허튼의 '5th Avenue And 57th Street'에서 거리가 무엇을 그에게 말하는지 인내심 있게 기다리며 패션을 몇 가지의 키워드로 분류해 매주 기고했다. 주제는 색상, 패션 아이템, 스타일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날씨, 꽃, 나무 등이나 사회 정치적인 부분들도 엮어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칼럼은 인간미가 느껴진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선 2분짜리 영상도 매주 함께 내보냈는데, 그의 목소리와 어울리는 위트 있는 재즈 음악과 함께 "Hello, This Is Bill Cunningham From New York"이 시작되는 도입부는 그만의 전매특허다. 그리고 또 하나 재밌는 점은 그가 영상에서 남긴 코멘터리는 모두 즉석이라는 것.
예를 들면, 2014년 2월 11일에 업로드된 'Whiteout'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안녕들 하셨나요? 눈으로 뒤덮인 뉴욕의 빌 커닝햄입니다. 저번 월요일에 휘몰아친 눈보라는 25년 동안 가장 아름다운 설경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눈 덮인 나무들도 층층이 레이어드 된 레이스처럼 보였고요. 하지만 수요일의 5th avenue는 좀 달랐죠. 제가 예측한 것처럼, 30%의 남성들이 눈 흙탕 더미 위를 뛰어넘어 다녔어요. (웃으며 구두 줌인) 구두를 절대적으로 고집하고 출근하더라고요? 스노우 슈즈를 신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발이 안 젖게 사무실로 가려는 모습이 참 재미있네요. 여성들의 경우에는, 딱 한 명만 플랫 슈즈를 신고 있었던 것 같고 다 눈에 대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남성들은? 절대 아니었죠. 그래서 덕분에 포토제닉한 사진들을 많이 건졌습니다. 자, 우리 이제 남성들이 서커스 줄에서 발레를 선보이는 사진들을 보며 다가올 발렌타인 데이와 수퍼볼을 미리 즐겨 봅시다."
또한 "Hey, Child!"라고 인사를 건네는 것은 빌의 특징이었다. 그에게 계층, 직업, 나이와 성별은 중요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오로지 사람들이 그들만의 스타일로 자신을 놀라게 만들길 기대했다. 그의 눈에 지나치게 따분하고 평범한 스타일일 때 그는 실망했고, 멋지고 독보적인 스타일을 볼 때면 아이처럼 흥분하며 미소를 머금고 카메라를 든 뒤 상대에게 암묵적으로 허락을 구했다. 상대가 긍정적일 때면, 그는 답례로 엄지를 치켜세우며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역시 그만의 방식이었다. 그는 파파라치처럼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것을 싫어했고, 사진을 찍을 때는 굉장히 신중하고, 조용하게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게 찍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일상 속의 자연스러운 장면이 포착될 수 있으므로. 이러한 그의 신념으로 인해 그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Bill Cunningham On The Street>에서는 그가 주장하는 방식으로 빌을 포착해야 했기에 카메라 제작진, 음향 녹음기와 붐 오퍼레이터는 허용되지 않은 채로 작은 카메라에 의존하여 제작되기도 했다.
어떤 유명한 사람이 어떤 고가의 옷을 입든, 그의 카메라 앞에서는 모두가 동등했기에 그는 패션계의 지평을 넓히는 인물이었다. 예를 들어 2000년대에는 남성이 드레스를 입는 것은 터부시되었는데, 빌은 뉴욕 타임즈를 계속 설득하여 마침내 드레스를 입은 남성의 사진이 실릴 수 있게 되었고, 이후엔 어떤 남성이 스커트나 드레스를 입은 사진을 가져와도 통과되었다. 또한 누가 카피를 했고 창조했는지 알 정도로 그의 날카로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는 1989년에 '아이작 미즈라히(Issac Mizhari)' 컬렉션의 한 아이템을 보고 '제프리 빈(Geoffrey Beene)'의 1976년 컬렉션의 아이템과 굉장히 유사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가차 없이 두 아이템을 동시 기재하기도 했다.
---------------------
돈은 가장 저렴하고, 해방과 자유가 가장 비싸다
빌은 패션쇼, 각종 파티와 갈라에도 초대받는 만큼 패션계에서 유명 인사였다. 하지만 그는 게스트로 초대받은 곳에는 절대로 가지 않고 오로지 사진가로서 초대받은 곳을 찾아갔다. 사람들은 그에게 음료와 음식을 권했으나 빌은 그곳에서 한평생 물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그는 그저 사람들과 인사를 간단히 하고 사진만 찍다가 뉴욕의 또 다른 행사의 장면을 잡아내기 위해 금세 자전거를 타고 떠나기 바빴다. 평상시에도 그랬지만 패션 위크와 같은 특별한 기간에 자신의 친구들을 만나도 그는 홀로 허름한 가게에서 샌드위치 하나와 커피 한 잔을 먹을 뿐이었다. 이처럼 그가 화려한 생활과 가장 맞닿은 지점에 있었어도 절제된 모습을 보인 것은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하기 위해 아웃사이더로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는 매거진이나 언론사에서 주는 월급을 계속해서 거절하기도 했다. 그가 '디테일즈 매거진(Details Magazine)'의 편집장 앞에서 여러 차례 수표를 아주 자랑스럽게 찢는 세레모니는 꽤 유명한 일화다.
그가 이토록 부와 사치를 멀리하게 된 계기는 그가 모자 디자이너로 활동한 당시로 거슬러 간다. 당시 한국 전쟁으로 인해 떠나려 할 때, 투자자는 그를 말리면서 미국을 떠난다면 윌리엄 제이에 그동안 지불한 투자금을 다시 다 내놓으라고 윽박질렀고 결국 빌과 그의 가족은 한순간에 어마어마한 금액을 지불할 수밖에 없게 됐다. 빌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부에 대한 반감이 생겼다. 그는 "돈을 받지 않으면 그들은 당신에게 간섭할 수 없다"며 "돈은 가장 싼 것이고, 해방과 자유가 가장 비싼 것"임을 강조했다. 그는 한평생 TV를 가진 적도 없으며, 영화를 보러 가지도 않았다. 수십 년 동안 어떤 상황이 변해도 카네기 홀의 싱글 침대가 하나 딸린 작은 스튜디오에서 거주하며 공용 화장실을 썼다. 그의 유일한 재산은 프렌치 워크 재킷과 베이지 팬츠를 입고 자전거를 타며 찍은 수많은 사진 더미였다.
---------------------
사진가를 넘어 역사가로
어쩌면 현재 우리는 빌보다 더 많은 사진을 찍어 올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 사진은 타인은 없고 내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오로지 나 자신에 대해 말하기만 급급하다.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말하는 CEO,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기보다는 자극적인 소재로 집객에 치중하는 사람들도 더러 보인다. 오늘날 패션도 예외는 아니다. 브랜드의 컬렉션보다 브랜드의 앰버서더가 더 중요하고, 화면 속에서 무신사 냄새, 스타터 팩으로 남을 재단하며 자신의 스타일이 어떻게 보여질 지 고민하는 게 거리 위 진짜 패션을 목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빌 커닝햄의 행적은 오늘날의 풍토와 전면으로 부딪친다. 그는 대상의 주체가 되기보다 대상을 바라보는 관찰자로서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였고, 패션을 천진난만하게 사랑했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수십 년 동안 거리의 패션을 기록해 온 그에게,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퍼보다는 패션 역사가로 빌을 기억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꿈을 꾸는 이에게는 끈기를, 패션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검소함을, 펜을 드는 이에게는 주관과 평등의 정신이 전달되기를 바라며 빌의 프랑스 명예 훈장 소감의 말로 마무리해 본다.
"제가 사진을 찍을 때, 많은 사람이 '저 사람 미쳤어! 맨날 옷만 찍잖아!'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입니다. 저는 협찬 받은 드레스나 그걸 입는 연예인들에 관심이 없어요. 그것이 중요합니까? 적어도, 옷을 보세요. 새로운 컷, 선, 색상이 전부입니다. 연예인이나 스펙터클이 아니라 옷이 중요하죠. 오늘날에도 이는 변하지 않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것을 찾을 것입니다."
_빌 커닝햄
=====================
https://oncuration.com/거리-푸른-신사-빌-커닝햄/
FaceBook : Bill Cunningham
https://www.facebook.com/BillCunninghamPhotographer/
신념의 스트릿 포토그래퍼 빌 커닝햄
온큐레이션
https://youtu.be/eX3HZ49zHeM
빌 커닝햄 촬영 모습
https://www.gettyimages.com/photos/bill-cunningham
https://www.facebook.com/dolcissimame.it/posts/pfbid0g6JS6seYWT6buysMhUCcbUyBGXW7j3mdbyo98MdV1Lf3AK4DRfj1unAGf5Vf5j6Al
[사진작가] 빌 커닝햄 (Bill Cunningham)
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Bill Cunningham New York”은 2010년 개봉되어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
- 이하 자료 보존을 위해서 내용 복사 했습니다. 아래의 링크를 이용해서 원문 참조 바랍니다.
신념의 포토그래퍼 빌 커닝햄 / 돈은 가장 저렴하고, 해방과 자유가 가장 비싸다
https://oncuration.com/거리-푸른-신사-빌-커닝햄/
"안나, 여기 봐주세요!"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wintourworld)는 손을 흔드는 포토그래퍼들을 가뿐히 지나친다. 대신 그녀는 가볍게 뒤를 돌아 새파란 프렌치 워크 재킷을 입은 백발의 사진가에게 포즈를 취하고 쇼장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빌을 위해 입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녀의 말대로 전 세계의 패셔니스타와 유명 인사들, 적어도 모든 뉴요커는 새파란 워크 재킷 차림의 노인 앞에 섰다.
빌 커닝햄을 향한 수식은 두 가지다. '뉴욕의 상징'과 '최초의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퍼'. 그는 1960년대부터 2016년, 그가 숨을 거두기 전까지 패션을 유일한 애인으로 두었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인생을 패션에 헌신했다. 그의 이야기가 패션을 사랑하는 또 다른 이들의 영감이 되길 바라며 이 글을 바친다.
---------------------
패션, 일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갑옷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퍼로 잘 알려진 빌은 사실 디자이너로 패션 커리어를 시작했다.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나 한 달 만에 자퇴하고 뉴욕으로 건너가 '윌리엄 제이(William J.)'라는 레이블을 만들어 모자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한국 전쟁 당시 나라의 부름으로 떠난 프랑스 캠프에서도 그의 패션 사랑은 굳건했다. 군 동료들의 부인에게 모자 디자인 주문받으며 사물함에는 각종 패션 매거진으로 채워놓고 휴일에는 패션 갈라, 매장 등을 패션의 본고장 파리에서 경험했다. 그의 군 생활은 파리로의 패션 유학이던 셈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그가 파리에서 경험한 것들을 전부 모자에 불어 넣었다. 패션과 삶은 그에게 하나였기에 과일, 야채, 새 등 모든 것이 디자인의 소재였다. 아방가르드하고 파격적인 디자인에 매료된 '제키 케네디(Jackie Kennedy)', '마를린 먼로(Marilyn Monroe)', '진저 로저스(Ginger Rogers)', '조앤 크로퍼드(Joan Crawford)' 등 아이코닉한 인물들이 너도나도 빌의 모자를 쓰게 된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시대가 빌을 배신한다. 1950년대부터 여성 모자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사그라들기 시작한 것이다. 1962년 패션에 대한 빌의 열정이 담긴 첫 브랜드, 윌리엄 제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늘 그래왔듯, 빌은 패션에 대한 사랑을 지켰다. 포기하지 않는 이에게 기회가 찾아온다고 했던가. 그는 '우먼스 웨어 데일리(Women's Wear Daily)'에서 패션 칼럼을 쓰기 시작할 무렵, 우연히 패션 사진을 찍게 된다. 히피를 시작으로 스트리트 패션을 카메라로 담게 되면서 최초의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퍼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격변과 큰 문제들 앞에 패션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곤 하죠. 그렇지만 패션은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갑옷입니다. 패션은 사라지지 않을 거에요. 그건 문명을 없애는 것과 같아요." 그는 그렇게 패션에 사랑을 맹세했다. 그렇기에 그의 행보는 가차 없었다. 상류층 여성의 패션을 담고자 초대받지 않은 파티에도 몰래 들어가는 일은 부지기수였고, 자신이 찍은 여성들이 우먼스 웨어 데일리에서 비웃는 논조로 편집되자, 망설임 없이 일을 그만두기도 했다.
빌의 사명감은 그의 카메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희한하게 패션쇼장에서 다른 포토그래퍼들과는 달리 프론트로우에서 그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단지 유명해서가 아니다. 보통 패션쇼장에서 포토그래퍼들은 초점 거리가 긴 망원 렌즈를 사용한다. 이렇게 되면 깔끔하고 정석적인 사진이 될 수 있으나, 항상 일정한 먼 거리에서 찍기 때문에 입체적 공간이 압축되고 인물은 고립된다. 빌은 디자이너들이 우리가 그렇게 옷을 보라고 만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시공간 속에서 서로를 앞, 뒤 옆에서 보는 것처럼 패션 사진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인물, 상황, 옷이라는 삼박자를 지키기 위해 그는 어디서나 24mm~35mm의 렌즈의 가벼운 카메라와 함께했다.
---------------------
거리가 말을 걸도록
"최고의 패션쇼는 거리입니다. 이때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것입니다." 빌은 옷이 자본주의의 논리에서 가장 보기 좋은 상품일 때가 아니라 거리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그 옷을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할 때 패션이 살아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따라서 패션 브랜드, 패션쇼의 컬렉션을 분석하여 트렌드를 예측하기보다는 주로 현실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입는지 파고들었다.
그렇게 빌은 뉴욕 타임즈의 온 더 스트리트 섹션에서 약 40년 동안 1백만 달러에 달하는 가치의 아카이브성 칼럼을 작성했다. 그는 맨허튼의 '5th Avenue And 57th Street'에서 거리가 무엇을 그에게 말하는지 인내심 있게 기다리며 패션을 몇 가지의 키워드로 분류해 매주 기고했다. 주제는 색상, 패션 아이템, 스타일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날씨, 꽃, 나무 등이나 사회 정치적인 부분들도 엮어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칼럼은 인간미가 느껴진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선 2분짜리 영상도 매주 함께 내보냈는데, 그의 목소리와 어울리는 위트 있는 재즈 음악과 함께 "Hello, This Is Bill Cunningham From New York"이 시작되는 도입부는 그만의 전매특허다. 그리고 또 하나 재밌는 점은 그가 영상에서 남긴 코멘터리는 모두 즉석이라는 것.
예를 들면, 2014년 2월 11일에 업로드된 'Whiteout'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안녕들 하셨나요? 눈으로 뒤덮인 뉴욕의 빌 커닝햄입니다. 저번 월요일에 휘몰아친 눈보라는 25년 동안 가장 아름다운 설경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눈 덮인 나무들도 층층이 레이어드 된 레이스처럼 보였고요. 하지만 수요일의 5th avenue는 좀 달랐죠. 제가 예측한 것처럼, 30%의 남성들이 눈 흙탕 더미 위를 뛰어넘어 다녔어요. (웃으며 구두 줌인) 구두를 절대적으로 고집하고 출근하더라고요? 스노우 슈즈를 신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발이 안 젖게 사무실로 가려는 모습이 참 재미있네요. 여성들의 경우에는, 딱 한 명만 플랫 슈즈를 신고 있었던 것 같고 다 눈에 대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남성들은? 절대 아니었죠. 그래서 덕분에 포토제닉한 사진들을 많이 건졌습니다. 자, 우리 이제 남성들이 서커스 줄에서 발레를 선보이는 사진들을 보며 다가올 발렌타인 데이와 수퍼볼을 미리 즐겨 봅시다."
또한 "Hey, Child!"라고 인사를 건네는 것은 빌의 특징이었다. 그에게 계층, 직업, 나이와 성별은 중요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오로지 사람들이 그들만의 스타일로 자신을 놀라게 만들길 기대했다. 그의 눈에 지나치게 따분하고 평범한 스타일일 때 그는 실망했고, 멋지고 독보적인 스타일을 볼 때면 아이처럼 흥분하며 미소를 머금고 카메라를 든 뒤 상대에게 암묵적으로 허락을 구했다. 상대가 긍정적일 때면, 그는 답례로 엄지를 치켜세우며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역시 그만의 방식이었다. 그는 파파라치처럼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것을 싫어했고, 사진을 찍을 때는 굉장히 신중하고, 조용하게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게 찍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일상 속의 자연스러운 장면이 포착될 수 있으므로. 이러한 그의 신념으로 인해 그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Bill Cunningham On The Street>에서는 그가 주장하는 방식으로 빌을 포착해야 했기에 카메라 제작진, 음향 녹음기와 붐 오퍼레이터는 허용되지 않은 채로 작은 카메라에 의존하여 제작되기도 했다.
어떤 유명한 사람이 어떤 고가의 옷을 입든, 그의 카메라 앞에서는 모두가 동등했기에 그는 패션계의 지평을 넓히는 인물이었다. 예를 들어 2000년대에는 남성이 드레스를 입는 것은 터부시되었는데, 빌은 뉴욕 타임즈를 계속 설득하여 마침내 드레스를 입은 남성의 사진이 실릴 수 있게 되었고, 이후엔 어떤 남성이 스커트나 드레스를 입은 사진을 가져와도 통과되었다. 또한 누가 카피를 했고 창조했는지 알 정도로 그의 날카로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는 1989년에 '아이작 미즈라히(Issac Mizhari)' 컬렉션의 한 아이템을 보고 '제프리 빈(Geoffrey Beene)'의 1976년 컬렉션의 아이템과 굉장히 유사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가차 없이 두 아이템을 동시 기재하기도 했다.
---------------------
돈은 가장 저렴하고, 해방과 자유가 가장 비싸다
빌은 패션쇼, 각종 파티와 갈라에도 초대받는 만큼 패션계에서 유명 인사였다. 하지만 그는 게스트로 초대받은 곳에는 절대로 가지 않고 오로지 사진가로서 초대받은 곳을 찾아갔다. 사람들은 그에게 음료와 음식을 권했으나 빌은 그곳에서 한평생 물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그는 그저 사람들과 인사를 간단히 하고 사진만 찍다가 뉴욕의 또 다른 행사의 장면을 잡아내기 위해 금세 자전거를 타고 떠나기 바빴다. 평상시에도 그랬지만 패션 위크와 같은 특별한 기간에 자신의 친구들을 만나도 그는 홀로 허름한 가게에서 샌드위치 하나와 커피 한 잔을 먹을 뿐이었다. 이처럼 그가 화려한 생활과 가장 맞닿은 지점에 있었어도 절제된 모습을 보인 것은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하기 위해 아웃사이더로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는 매거진이나 언론사에서 주는 월급을 계속해서 거절하기도 했다. 그가 '디테일즈 매거진(Details Magazine)'의 편집장 앞에서 여러 차례 수표를 아주 자랑스럽게 찢는 세레모니는 꽤 유명한 일화다.
그가 이토록 부와 사치를 멀리하게 된 계기는 그가 모자 디자이너로 활동한 당시로 거슬러 간다. 당시 한국 전쟁으로 인해 떠나려 할 때, 투자자는 그를 말리면서 미국을 떠난다면 윌리엄 제이에 그동안 지불한 투자금을 다시 다 내놓으라고 윽박질렀고 결국 빌과 그의 가족은 한순간에 어마어마한 금액을 지불할 수밖에 없게 됐다. 빌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부에 대한 반감이 생겼다. 그는 "돈을 받지 않으면 그들은 당신에게 간섭할 수 없다"며 "돈은 가장 싼 것이고, 해방과 자유가 가장 비싼 것"임을 강조했다. 그는 한평생 TV를 가진 적도 없으며, 영화를 보러 가지도 않았다. 수십 년 동안 어떤 상황이 변해도 카네기 홀의 싱글 침대가 하나 딸린 작은 스튜디오에서 거주하며 공용 화장실을 썼다. 그의 유일한 재산은 프렌치 워크 재킷과 베이지 팬츠를 입고 자전거를 타며 찍은 수많은 사진 더미였다.
---------------------
사진가를 넘어 역사가로
어쩌면 현재 우리는 빌보다 더 많은 사진을 찍어 올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 사진은 타인은 없고 내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오로지 나 자신에 대해 말하기만 급급하다.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말하는 CEO,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기보다는 자극적인 소재로 집객에 치중하는 사람들도 더러 보인다. 오늘날 패션도 예외는 아니다. 브랜드의 컬렉션보다 브랜드의 앰버서더가 더 중요하고, 화면 속에서 무신사 냄새, 스타터 팩으로 남을 재단하며 자신의 스타일이 어떻게 보여질 지 고민하는 게 거리 위 진짜 패션을 목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빌 커닝햄의 행적은 오늘날의 풍토와 전면으로 부딪친다. 그는 대상의 주체가 되기보다 대상을 바라보는 관찰자로서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였고, 패션을 천진난만하게 사랑했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수십 년 동안 거리의 패션을 기록해 온 그에게, 스트리트 패션 포토그래퍼보다는 패션 역사가로 빌을 기억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꿈을 꾸는 이에게는 끈기를, 패션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검소함을, 펜을 드는 이에게는 주관과 평등의 정신이 전달되기를 바라며 빌의 프랑스 명예 훈장 소감의 말로 마무리해 본다.
"제가 사진을 찍을 때, 많은 사람이 '저 사람 미쳤어! 맨날 옷만 찍잖아!'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입니다. 저는 협찬 받은 드레스나 그걸 입는 연예인들에 관심이 없어요. 그것이 중요합니까? 적어도, 옷을 보세요. 새로운 컷, 선, 색상이 전부입니다. 연예인이나 스펙터클이 아니라 옷이 중요하죠. 오늘날에도 이는 변하지 않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것을 찾을 것입니다."
_빌 커닝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