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풀
-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기형도 -
나는
맹장을 달고도
초식할 줄 모르는
부끄러운 동물이다
긴 설움을
잠으로 흐르는 구름 속을 서성이며
팔뚝 위로 정맥을 드러내고
흔들리는 영혼으로 살았다
빈 몸을 데리고 네 앞에 서면
네가 흔드는 손짓은
서러우리만치 푸른 신호
아아
밤을 지키며 토해낸 사랑이여
그것은 어둠을 떠받치고 날을 세운
그 아름다운 혼인 것이냐
이제는 부리를 내리리라
차라리 웃음을 울어야 하는 풀이 되어
부대끼며 살아보자
발을 얽고 흐느껴보자
맑은 날 바람이 불어
멍든 배를 쓸고 지나면
가슴을 울쿼 솟구친
네가 된 나의 노래는
떼지어 서걱이며
이리 저리 떠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