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무성영화의 전성기 시절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이라는 영화스타가 있었다. 그 시절 배우들처럼 보드빌(vaudeville) 출신인 부모 밑에서 세 살 때부터 무대에 섰고, 영화계에 입문해서는 각본도 쓰고, 배우도 하고, 영화감독까지 맡은 다재다능한 탤런트였다. 게다가 그는 무모한 스턴트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주위에서 만류할 정도로 위험한 곡예 연기를 별다른 안전장치 없이 해냈다. 정밀검진 결과 목 부위의 골절이 발견되었고 수년 동안 별 통증을 못 느꼈다고 말해 주변 사람들을 놀랍게 했다.
그는 1910년대 후반부터 보드빌 연기자 생활을 포기하고 영화 제작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연기 스턴트에 필요한 힘과 기술을 체득했기 때문에 카메라 워크와 스토리 구성을 연구하며 자신의 영화 세계를 구축했다. 작은 키에 비해 얼굴이 커 무표정한 그의 연기가 잘 보였다. 이 덕분에 ‘the greate stone face’라는 유명한 별명을 얻기도 했다. ‘광풍에 쓸려 다니는 사람’, ‘넘어지는 주택’, 방’해만 되는 아내의 도움’ 등은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특징이다. 그의 독특한 표현 기법은 오늘 날 웨스 앤더슨, 재키 챈(성룡), 빌 머레이의 영화에서 차용되기도 한다.
1920년대의 무성영화 시절은 그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에 제작한 <sherlock jr.>(1924), <the general>(1926), <the cameraman>(1928)은 이 시절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인데, 이제 대부분 유튜브에서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1928년 대형 영화사 mgm과 고용계약을 맺게 되어 영화제작에 대해 간섭을 받게 되자, 그의 창조적 재능은 시들기 시작했다. 이어서 유성영화 시대가 도래하고 개인적으로 이혼과 재혼을 반복하면서 그는 심각한 알코올 중독에 빠진다. 그는 한동안 할리우드에서 사라져 방탕한 셀레브리티로 지내게 된다.
그는 1940년에 23살 어린 부인과 재혼하면서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한다.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던 술을 끊고, 위험한 스턴트 대신 tv의 코미디 배우로 전향한다. 영화에 단역이나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하고, 광고에도 꾸준히 얼굴을 내밀었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tv쇼 <the buster keaton show>를 방송하기도 했다. 70세의 나이인 1965년 토론토에서 촬영한 캐나다 건설안전협회 광고영상은 그의 마지막 연기가 되었다. 이듬해 폐암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indiepost
https://www.indiepost.co.kr/post/12364
1. 개요
joseph frank "buster" keaton
(1895년 10월 4일 - 1966년 2월 1일)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영화 감독. 찰리 채플린, 해럴드 로이드, 로렐과 하디와 무성영화를 이끌던 전설, 그리고 스턴트 액션의 대가이자 대부.
2. 생애
약장수들이 소비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벌이는 일명 '메디슨 쇼'를 행하는 보드빌 배우의 아들로 태어난 키튼은 생후 18개월부터 가족들과 함께 보드빌 공연을 했다. 주변 사람들이 아동 학대로 부모를 신고할 정도로 어린 나이부터 위험한 슬랩스틱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해서, 마술사 해리 후디니가 버스터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심지어 그의 산파였던 사람이 지어줬다는 설도 있을 정도로 여러 바리에이션이 존재하기 때문에 누가, 어떤 연유로 이 이름을 지어줬는지는 불확실하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가족들과 보드빌 배우로 활동하던 키튼은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으로 가족 쇼가 중단되자 새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1917년 당대 유명 코미디언 로스코 아버클(1887~1933) 의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함으로써 영화계에 데뷔한다. 로스코 아버클은 키스톤 영화사에서 자신의 사촌 동생이자 롱 다리를 이용한 다리 찢기로 유명한 코미디언인 알 세인트 존 (1892~1963)과 콤비로 활동하면서 미국 내에서 높은 인기를 얻었고,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 영화 스승이기도 했던 인물이다. 이 시기 아버클은 키스톤에서 독립하고 20세기 폭스사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자 유명 영화 제작자인 조셉 쉥크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코미디언 최초로 자신의 개인 스튜디오를 설립한 상태였는데 우연히 키튼의 슬랩스틱 연기를 보고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자신과 영화를 같이 찍자고 러브콜을 보냈던 것이다. 키튼은 아버클과의 첫 미팅 때 아버클에게 영화 카메라 한 대를 빌려 달라고 부탁, 밤을 새워가면서 카메라의 작동 원리와 자신이 카메라에 찍히면 어떻게 보일지 등을 연구했다고 한다. 이들은 '재치있는 뚱보와 어벙한 홀쭉이' 기믹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20년 아버클과 조셉 쉥크의 지원하에 키튼은 [바보]라는 정극 영화에 출연하며 단독 주연으로 데뷔한다. 때 마침 찰리 채플린이 퍼스트 네셔널에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로 이적하면서 퍼스트 내셔널의 개인 스튜디오를 넘겨주었고 키튼은 스스로 감독 및 주연을 맡은 단편 [일주일]을 시작으로 감독 / 각본/ 주연을 도맡아하며 수많은 걸작들을 탄생시키게 된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아버클은 1921년, 자신이 주최한 파티에서 단역 여배우 한 명이 사망하는 사건으로 갑작스럽게 몰락하고 만다. 문제는 그녀의 지인이자 전과자였던 밤비나 델몬트라는 여성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아버클이 여배우를 죽였다' 라고 거짓 진술을 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녀는 재판 이후 헐리우드의 뒷모습이라는 강연회를 열어 떼돈을 벌어들였고 아버클은 알코올 중독 에 걸려서 쓸쓸하게 최후를 맞았다. 1922년 단편 <경찰>을 통해서 미국의 사법부를 풍자했을 정도로 키튼은 아버클을 마지막까지 변호한 영화계 인물이었다. 아버클의 사망 이후, 델몬트가 거짓 진술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미국 사법부는 공식적으로 아버클에게 사죄하였다. 덤으로 악녀임이 드러난 델몬트는 무시당했고 자업자득으로 이 여자도 몰락하여 알코올 중독으로 비참하게 죽게 된다.
1920년대, 버스터 키튼은 찰리 채플린, 해럴드 로이드와 함께 코미디 스타로 대인기를 누렸는데, 채플린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적극적이었고, 로이드가 당시 절정에 다다른 영화라는 매체를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했다면 키튼은 자신의 뛰어난 스턴트 능력으로 코믹한 액션 연기 연출에 방점을 찍었다. 그의 스턴트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인데, 키튼은 본인의 스턴트는 물론이고 여차하면 다른 배우들의 스턴트까지 도맡아 했다고 한다. 비록, 스턴트 때문에 갖가지 부상들에 시달렸지만 키튼은 위대한 무표정 the great stone face라는 별명까지 생길 정도로 별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1924년, [셜록 주니어]촬영 중 목뼈에 금이 갔는데, 스트레스성 두통이겠지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다른 영화를 촬영하던 도중 왼쪽 갈비뼈가 부러져서 엑스레이 검사를 받은 후에야 이미 목뼈도 골절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흠좀무. 실제로 영화 속 키튼도 항상 무표정이다. 정말 절대로 웃거나 울지 않는다.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생기면 잠깐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올려보고는 그만. 위에서 말했던 아버클 시기 단편들에선 과장된 연기를 주로 선보였지만, 어린 시절 선보였던 보드빌 쇼에서 배운 "내가 무표정이면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웃는다" 라는 일종의 공식을 떠올려 단독 주연으로 데뷔할 때부터 무표정을 컨셉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무표정 속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들이 많아 채플린만의 감성적이고 다채로운 얼굴 표정과 주로 비교된다.
.
이처럼 전성기를 구가하던 키튼은 1926년 개봉한 [제너럴]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제너럴]은 철덕이었던 키튼의 취향을 살려서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실제로 운용된 증기 기관차를 박살내고 500명의 엑스트라를 기용하는 등 75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제작비로 제작된 영화였지만 흥행은 제작비의 1/5인 15만 달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제너럴의 실패로 키튼은 그 동안 자신의 영화를 전담하던 제작자이자 키튼의 동서이기도 했던 조셉 쉥크와의 계약이 파기당하고 아내에게도 이혼당한다.
이후 키튼은 동료 연예인들의 극구 만류에도 불구하고 재기를 위해서 유성 영화에 출연하기로 결정, 당대 헐리우드에서 가장 큰 영화사였던 mgm과 전속 계약을 맺는다. 그러나 계약 이후, 키튼의 인기는 목소리 문제, 영화사와의 불화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오히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결국, 아내와 이혼 이후, 알코올 중독 증세까지 보이고 있던 키튼은 1933년 mgm에서 해고당하고 배우가 아닌 코미디 작가를 본업으로 삼으며 힘겹게 살아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훗날 키튼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였다고 회고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이 시기 그는 평생의 반려자가 된 댄서 엘라노어 노리스와 결혼한다.
역시 무성영화 시절에는 감독으로 유명했다가, 유성영화의 시대가 오면서 배우로 활약한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과 함께 출연한 빌리 와일더 감독의 1950년 작품 <선셋 대로>가 이러한 키튼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영화이다. 슈트로하임은 무성영화때 대단히 잘 나가던 감독이지만 지금은 배우의 뒷바라지를 하고 사는 집사, 버스터 키튼은 한때 잘나갔던 무성영화 배우의 현역 시절 친구로 카드 놀이 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비록 버스터 키튼은 별다른 대사 없이 잠깐 얼굴만 스쳐가는 카메오 수준의 분량이라 모르는 사람은 그냥 그러려니 지나쳤지만, 키튼을 아는 올드팬들은 이를 보며 굉장히 놀라워했다고 한다.
이후 버스터 키튼은 자신이 아직 완전히 몰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전성기 시절 라이벌인 해럴드 로이드의 후원하에 1951년부터 tv에 지신의 전성기 시절 영화를 다시금 선보인다. 키튼의 슬랩스틱은 당시 복고 열풍이 불고있던 대중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키튼은 다시 주목받게 된다. 그리고 1952년, 찰리 채플린의 자전적 영화 <라임라이트>에서 채플린의 보조 피아노 연주자 역할을 맡게 된다. 근데 분장한 모습은 그루초 막스 채플린은 키튼을 위해서인지, 완벽한 영화를 위해서인지 해당 장면을 편집할 때 본인의 파트는 줄였지만 키튼의 파트는 전부 남겨두었다고 한다. 재기를 위한 그의 불꽃같은 열정은 드디어 다시금 관객들의 눈에 띄게 되고 그는 다시 꾸준히 여러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mgm 시절처럼 자신의 캐릭터가 파괴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스톤페이스를 몰락한 무성영화 배우라는 자신의 새로운 캐릭터에 접목시키면서 제 2의 전성기를 열게된다.
이후, 키튼은 그가 출연했던 영화들을 연이어 재개봉시키고 광고도 숱하게 출연하여 안정적인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였고 1957년에는 키튼의 전기 영화가 나오는가 하면, 1959년 미국 아카데미에서는 키튼에게 평생공로상을 수여하면서 명예도 완전히 회복하였다. 이 시기 오히려 채플린이 조금 올드한 영화들을 찍어내며 관객들에게 외면받은 것을 생각하면 그의 성공은 대단하다.
그의 마지막 영화는 스티븐 손드하임 원작의 뮤지컬을 영화화한 [로마에서 일어난 기묘한 사건, 1966]인데, 이 역시 호평 일색. 1965년에는 베니스 영화제에 초대되어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3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영광에 마침내 한을 풀었던 것일까? 1966년 2월 1일, 영화사에 길이 남을 이 위대한 배우는 폐암으로 눈을 감는다.
"박수 소리가 멋지군요. 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리고 뒤늦게 천재를 알아 본 신세대 영화 팬들의 추모가 이어진다. 그의 시대를 앞서간 시도들은 영화 학자와 영화 감독들에 의해 후일 재조명된다. 이를 테면,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 에서 주인공들이 키튼과 채플린 중 누가 더 위대한가로 다투는 장면이 있다.
키튼의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던 60년대 말부터 80년대 후반까지는 영화계에서 채플린보다 키튼을 더 높이 사는 분위기도 조성되었다. 영국의 sight and sound 지에서 매 10년 마다 선정하는 세계 10대 영화 리스트에서 꾸준히 한 자리를 차지하던 <시티 라이트> 는 72년과 82년도에 제외되었는데, 바로 키튼의 <제너럴> 때문이었다. 그 뒤로는 둘 다 빠지고 <모던 타임즈> 가 한 자리.
2012년 8회째 개최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두번째 날 저녁에 진행되는 행사에 키튼의 작품 <카메라맨> 이 상영되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깔깔깔.
모 영화 평론가는 두 거장의 대조적 이미지에 대해 이런 분석을 내렸다. "채플린은 사랑스런 방랑자(the tramp)이지만, 사회에 대해 냉소적이다. 대부분의 채플린 영화들은 그가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방랑을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반면, 키튼는 무표정한 얼굴(stone face)이지만, 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결국 사회에 편입되는 것으로 끝난다." 실제로 키튼도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채플린의 방랑자는 귀여웠지만 범죄를 저지를 기회가 온다면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달라요. 언제나 정직했죠.' 무성 영화 시대의 두 거장 버스터 키튼 vs 찰리 채플린
3. 영향력
성룡이 가장 존경하고 영감을 많이 받은 배우이자 감독이다. 아직도 성룡에게 가장 존경하는 영화인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0.5초만에 버스터 키튼이라 말할 정도. 성룡은 80년대 헐리웃 진출 당시, 제작환경에 적응을 못해 완성도가 떨어지는 영화를 많이 찍었는데, <배틀 크리크> 를 찍을 당시 스텝으로부터 "당신은 버스터 키튼과 비슷한 면이 있다. 참고해 봐라"라는 조언을 들었다. 성룡은 버스터 키튼의 영화를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고, 홍콩으로 컴백한 뒤에 감독한 영화들에서는 키튼의 영향력이 아주 강하게 느껴진다. 특히, 프로젝트 a2의 화판이 쓰러지는 장면은 완벽한 키튼의 오마쥬.
네이버 스페셜 리포트에서 더 많은 사진과 함께 키튼의 인생을 훑어볼 수 있었지만, 네이버 매거진 서비스가 2018년 07월 18일부로 종료되어 더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내용은 본 항목과 살짝 다른데, 참고 자료가 조금 다른 모양. 위대한 무표정 버스터 키튼
이동진 평론가가 선정한 '올타임 베스트 10' 명단에 <우리의 환대>가 있다.
https://namu.wiki/w/%eb%b2%84%ec%8a%a4%ed%84%b0%20%ed%82%a4%ed%8a%bc
관련 자료 링크 :
셜록2세.sherlock jr.(buster keaton).1924.1080p.bw
https://heisme.skymoon.info/article/sugginfo/461
싸움왕버틀러.battling butler(buster keaton).1926.1080p.bw
https://heisme.skymoon.info/article/sugginfo/462
제너럴.the general(buster keaton).1926.1080p.bw
https://heisme.skymoon.info/article/sugginfo/4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