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함포템킨.Battleship Potemkin.1925.BW

흑백 무성영화

1905년, 제정 러시아 시대. 전함 포템킨의 수병들은 장교들의 학대와 열약한 근무 조건에 불만을 가지게 된다. 썩은 고기를 식량으로 사용한 사실은 그들의 반란의 기폭제로 작용한다. 수병을 없애버리라는 장교의 명령에 포병들은 거역하고 수병과 포병은 힘을 합쳐 동지가 된다.

전함을 완전히 장악한 이들은 승리감에 젖어 흑해 오뎃사 항구로 향하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시민들은 수병들을 환영하러 부두로 나온다. 한편 짜르의 명령을 받은 정예 코자크 군대가 출동하여 그들에 반항하는 시민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한다. 전함 포템킨에 탄 수병들을 환영하려 했던 시민들은 갑작스런 군대에 의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간다.

수 많은 희생자가 나지만, 분노한 시민들은 수병들과 합세하여 봉기, 짜르의 군대와 싸우며 혁명의 대열에 서는데...


전함 포템킨 (1925)
The Battleship Potemkin, Броненосец Потёмкин / Bronenosets Potyomkin
전쟁/드라마 러시아
75분, 15세이상관람가
(감독) 세르게이 M. 에이젠슈테인
(주연) 알렉산드르 안토노프, 블라디미르 바르스키, 그리고리 알렉산드로프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0470


러시아혁명 때 포템킨호의 선상반란을 중심으로 한 영화.
원어명 Bronenosets Potyomkin
감독 그리고리 알렉산드로프(Grigori Aleksandrov), 세르게이 M.에이젠슈테인(Sergei M. Eisenstein)
각본 세르게이 M. 에이젠슈테인(Sergei M. Eisenstein), 니나 아가자노바 슈트코(Nina Agadzhanova Shutko)
배우 I.보브로프(I. Bobrov), 줄리아 에이젠슈테인(Julia Eisenstein), 알렉산드르 안토노프(Aleksandr Antonov)
상영시간 75분
제작사 소련 고스키노(Goskino)사
출시일 1952년 1월


몽타주 화법이 적용된 에이젠슈테인의 대표작이다. 포템킨호의 선상 반란과 오데사 항의 대학살을 중심으로, 영화도 대중 선동의 뛰어난 무기가 됨을 알게 된다.

혁명 이후의 러시아영화는 민중의 계급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교육과 선동의 기제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의도에서 《전함 포템킨》은 실패한 1905년의 제1차 러시아혁명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시기는 1905년의 제정 러시아이다. 흑해 함대의 포템킨호에서 수병들이 선상 반란을 일으킨다. 배를 장악한 이들은 오데사 항에 정박한다.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부둣가 계단에 모여 환호한다. 시민들 뒤로 차르의 군대가 출동하여 무차별 발포의 학살이 시작된다. 분노한 시민과 수병이 합세하여 혁명의 대열에 선다.

에이젠슈테인은 혁명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계급 투쟁과 전투적 민중의 '전형'을 그리려 하였다. 따라서 영화에는 특정 주인공이 아닌 여러 집단의 성원으로서의 전형들만 등장한다.

두 개의 극단적인 대조 쇼트로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 몽타주 화법이다. 전함의 장교와 수병, 카자크 군대와 시민들로 반혁명과 혁명이 확실히 대립,양분되며 둘 간의 적대감만 있다. 내려치는 카자크 병사의 칼, 깨어져 바닥에 뒹구는 안경, 피 흘리는 여인의 얼굴 등은 상황 묘사라든가 감정의 고조를 넘어 관객들에게 단호한 선택을 요구한다. 몽타주 화법과 사회 의식은 1930년대 영국의 사회적 다큐멘터리에까지 이어진다. 세계 영화사에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전함 포템킨

러시아혁명, 학살과 승리의 서사시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Sergei Eisenstein)

장르느와르와 그리피스, 에이젠슈테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서양영화 초창기의 맥락과 영화이론을 이해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또 서양영화가 동양영화에 끼친 영향을 생각할 때, 비록 그 영향이 때로 강압적이었다 하더라도 이 세감독은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과제이다.
특히 에이젠슈테인이 사회주의 영화를 대표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한, 타락한 영화세상에서 사히주의 영화를 통해 어던 희망적 단서를 찾고자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를 찾아가곤 한다. 그 대표작이 바로 <전함 포템킨>이다. 포템킨 호의 수병 반란과 오데사 계단에서 벌어진 대학살극이 <전함 포템킨>을 이루고 있는 핵심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영화도 무기가 될수 있으며, 뛰어난 대중교육책이자 선동임을 확인하게 된다. 억누르는 전함의 장교와 억눌리는 수병들, 압살하는 코사크 군대와 피 흘리는 인민들, 이 모든 것이 극단적인 대조를 통하여 표현된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즐겨 그렸고 극장의 무대 디자이너로 일했던 에이젠슈테인에게 그러한 서술상의 대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장작 에이젠슈테인을 에이젠슈테인으로 만든 것은 몽타주로 알려진 그의 화법이었다. 그의 선배 푸도프킨이 필름의 결합을 통해 서술적 의미의 확대와 강조를 꾀했다면, 에이젠슈테인은 두개의 대조적인 숏을 통합해 새로운 개념을 창조했다.
코사크 병사가 내리치는 칼, 깨어져 뒹구는 안경, 클로즈업된 피흘리는 여인의 얼굴...... 이런 편집을 통해 에이젠슈테인은 상황묘사라든가 감정의 고조를 넘어서서 관객들에게 단호한 정치적 입장을 요구하는 논리로 떨쳐나갔다. 물론 그는 이 오데사 계단 장면만이 아니라 많은 장면에서 여러대의 카메라를 설치해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크기로 숏들을 찍었다. 그는 찍은 것을 어떻게 편집하느냐가 영화창작의 처음이자 출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전함 포템킨>은 이러게 포템킨 선상 반란에서 시작하여 오데사 계단을 거쳐 마지막에 승리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숏도 낭비하지 않으면서 영화를 끌어간다.
서구 무성영화 특유의 지루하고 나른한 느낌은 찾을래야 찾을수가 없다.
하지만 그의 몽타주론에 대한 비판 역시 만만찮았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1929)을 비롯한 그의 작품에 대한 비판은 끝없이 어어졌고, 그는 자신의 몽타주론을 완성하기 위해 낮에는 소련 영화학교의 강단에서, 밤에는 연구실에서 일했다. 급기야 그는 형식주의자로 매도당했고, 어떤 영화는 정부의 제재를 받기도 했다.
물론 그는 '위대한 사회주의'를 믿었지만 그것을 온순하게 따르는 멍청한 예술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형식을 연구하는 사람을 형식주의자라고 한다면 매독을 연구하는 사람은 매독주의자다"라고 항변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결국 <전함포템킨>은 소련 영화의 명예로 남아있을뿐, 자신의 조국에서는 이오지지 않았다. 또 인물 전형화론가은 그의 그의 독특한 이론 역시 후학들에게 과제로 남아있을 뿐이다. 역설적으로 그의 몽타주 기법과 사회의식은 1930년대 영궁의 사히적 다큐멘타리로 이어졌다. 더욱 기가막힌 것은 이젠 거의 모든 헐리우드 영화가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그의 편집 기법을 써먹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몽타주 이론은 이 타락한 영화세상만큼이나 통속화되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흥행작들이 영화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다시 <전함 포템킨>을 읽어야 한다. 고전이어서가 아니라 영화를 세상과 아이들의 미래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뜻에서다.

<이효인>


감독: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에이젠슈테인(Sergei M. Eisenstein)
캐스트: I. 보브로프(I. Bobrov)/ 줄리아 에이젠슈테인(Julia Eisenstein)/ 알렉산드르 안또노  프(Aleksandr Antonov)/ 베아트리체 비톨디(Beatrice Vitoldi)
제작년도: 1925년(구소련)
장르: 서사극
요약: 전세계 영화평론가들에게 항상 가장 위대한 영화로 손꼽혀 오는 고전명작

줄거리

1905년, 제정 러시아 시대. 전함 포템킨의 수병들은 장교들의 학대와 열약한 근무 조건에 불만을 가지게 된다. 썩은 고기를 식량으로 사용한 사실은 그들의 반란의 기폭제로 작용한다. 수병을 없애버리라는 장교의 명령에 포병들은 거역하고 수병과 포병은 힘을 합쳐 동지가 된다. 전함을 완전히 장악한 이들은 승리감에 젖어 흑해 오뎃사 항구로 향하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시민들은 수병들을 환영하러 부두로 나온다. 한편 짜르의 명령을 받은 정예 코자크 군대가 출동하여 그들에 반항하는 시민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한다. 전함 포템킨에 탄 수병들을 환영하려 했던 시민들은 갑작스런 군대에 의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간다. 수 많은 희생자가 나지만, 분노한 시민들은 수병들과 합세하여 봉기, 짜르의 군대와 싸우며 혁명의 대열에 선다.

영화 해설

1925년에 무성영화로 제작되어 지금까지 촬영 기법의 빼어난 교과서로 활용되고 있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감독의 <전함 포템킨>이 50여 년이 지난 후인 1976년 소련 영화기금과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박물관 협찬으로 세르게이 유트게비치 주도하에 바실레이에프 감독에 의해 새 필름으로 재생되었다는 사실은 고무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전함 포템킨>은 전세계 영화평론가들에 의해서 항상 가장 위대한 영화로 손꼽혀 오는 고전 최고의 명작이다. 이 영화가 무성 영화이고 흑백 영화이면서도 아직도 그러한 세계 최고의 위치를 누릴 수 있는 까닭은 '몽타쥬'라고 불리우는 편집 기법과 화면 자체의 그래픽이 지니고 있는 놀라운 힘 때문이다. 여기에다 거의 다큐멘타리에 가까운 뛰어난 촬영 기법과 픽션이 훌륭하게 어우러져 역사를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절정은 오뎃사 계단의 시민 학살 장면이다. 계단 위에서 반란군에 환호하는 시민들, 그러나 돌연 짜르의 진압군이 나타나고, 시민들은 혼비백산하여 흐트러진다. 일렬로 다가오는 진압군과 도망가는 시민들을 에이젠슈테인은 그 유명한 몽타쥬 기법으로 대비시켰다. 에이젠 슈테인은 영화의 리얼리티를 위해 직업 배우의 연기가 아닌 진짜 수병들과 오뎃사 시민들을 영화에 출연시켜 또다른 생동감을 준다. 또한 포템킨호에서 함포사격하는 장면과 돌로 조각한 사자상의 교차편집은 영화사상 가장 빛나는 '몽타주 기법'으로 간주된다. 특히 브라이언 드팔마 감독의 <언터처블>의 열차역 사내에서 유모차가 굴러내려가는 장면을 기억하는 영화팬들은 그 장면이 바로 이 영화의 오데사 계단 장면을 차용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전함 포템킨>은 <1905년 그 해>시리즈 중의 하나인데 나머지 시리즈물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05년은 아는 바와 같이 러시아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해였다. 노일전쟁 중이었던 1905년 1월 소위 '피의 일요일' 사건이 있었고, 그 후로 각계각층의 불만이 처음으로 전국적인 혁명의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이 영화도 포템킨이라는 한 전함에서 일어난 사건이 어떻게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혁명적인 상황으로 발전하게 되는가를 실험적이면서도 충실한 촬영기법으로 진지하게 더듬어 나가고 있다. 너무 진지한 나머지 신파조로 전재되는 부분들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그것이 무성영화 일반의 한계라는 점을 고려할 때 크게 흠잡을 일은 아니다.

영화의 배경은 1905년 제정 러시아 시대이고, 당시 제정 러시아 함대의 기함이던 전함 포템킨호의 수병들의 반란과 그 수병들에게 공감하여 시위를 일으킨 민중들을 짜르군대가 학살한 유명한 '오뎃사 학살 사건'이 주요 내용이다. 이런 내용 이외에 요즘의 영화에서는 보편화 되어버린 '몽타쥬'라는 편집 기법을 바로 이 에이젠슈테인 감독에 의해 첫 선을 보였고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영화사에 획을 긋는 작품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무성영화가 대부분 그렇듯이 이 영화도 자막을 통하여 중간중간 단락의 제목을 제시하고 있는데 첫제목이 <인간과 구더기>이다. 전함 내에서 수병들이 끈으로 받쳐져 공중에 걸린 간이침대에서 잠들을 자고 있다. 천으로 되어 흔들리기도 하는 그 침대들을 카메라로 잡은 구도가 인상적이다. 어느 화가가 그 장면을 그 구도대로 그린다면 아마 빼어난 작품 하나를 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몇몇 수병들은 잠을 자지 않고, 구더기가 우글거리는 고기로 국을 끊여 배식을 하는 지휘관들에 대해 분노를 터뜨린다. 그중에서도 바쿨린추크라는 수병이 주위 사람들을 선동하다시피 흥분을 한다. 수병들의 항의가 거세어지자 결국 군의관이 취사실에 걸려 있는 고기를 안경알로 확대해서 보며 점검을 한다. 과연 구더기가 우글거리고 있다. 그러나 군의관은 이건 해충이 아니라 구더기일 뿐이라면서 소금으로 씻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더 나아가 그 고기는 질좋은 고기라고 우긴다. 함장을 계속 항의하는 수병들을 갑판으로 불러모아 총살 위협을 하기도 한다. 이런 문제들이 발단이 되어 함장을 비롯한 장교들과 수병들 사이에 격투가 벌어지고 총격전이 벌어지기까지 한다.

마침내 수병들이 승리를 하여 전함을 장악하지만 그 와중에 바쿨린추크가 장교가 쏜 총에 맞아 죽는다. 바쿨린추크의 시신이 오뎃사 주민들 사이에서는 전함 포템킨의 악랄한 지휘관들을 성토하는 분위기가 싹튼다. 장의(葬儀) 천막 안쪽에 위치한 카메라가 바쿨린추크의 시신 너머로 잡은 바다 풍경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특히 밤바다에 자욱한 안개 장면은 민중들의 한(恨)과 혁명 전야의 기이한 고요를 상징하고 암시하는 데 효과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주민들은 포템킨의 지휘관들에 대한 분노를 전제정치 전체로 투사하여 드디어 시위를 하기 위해 떼를 지어 모여든다. 방파제를 따라 행진해 오는 주민들의 모습이라 든지 마을 계단을 내려오는 주민들의 모습들은 현대의 발달된 촬영기기로도 잡아내기 힘든 명장면들일 것이다.

주민들은 갖가지 구호들을 외친다.
'죽 한 그릇 때문에 죽은 그를 기억하라!'
'전몰용사들은 기억하리라. 하나를 위한 전체, 전체를 위한 하나!'
'도살자를 처단하라!'
'미래는 우리의 것이다!'
수병들이 장악한 전함 포템킨이 해안으로 다가오고 주민들 대표가 식량을 실은 배들을 타고 전함으로 접근하여 합세한다. 전함의 웅장한 포신(砲身)들의 모습이 자주 카메라에 잡히는데 그것은 영웅적이고 확고한 혁명의 의지를 상징한다.

그러나 전제정치의 세력이 주민들의 시위를 가만히 놔둘리 없다. 마을 광장으로 통하는 널찍한 오뎃사 계단으로 주민들이 몰려오자 출동한 군인들이 총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아비규환을 이루는 그 오뎃사 계단 장면은 충격 콜라주 기법으로 처리되어 있는데 아직까지 그만한 명장면을 연출해 낸 감독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기껏해야 영화 <대부>나 <언터처블> 같은 데서 페스티시(혼성모방) 형식으로 흉내를 내었을 뿐이다. 특히 유모차가 계단을 구르는 장면은 어느 영화에서 보든 여전히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여러 가지 면에서 <전함 포템킨>은 영화를 배우려는 사람들의 필수 교과서라 아니할 수 없다.

두 개의 극단적인 대조 쇼트로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 몽타주 화법이다. 전함의 장교와 수병, 카자크 군대와 시민들로 반혁명과 혁명이 확실히 대립,양분되며 둘 간의 적대감만 있다. 내려치는 카자크 병사의 칼, 깨어져 바닥에 뒹구는 안경, 피 흘리는 여인의 얼굴 등은 상황 묘사라든가 감정의 고조를 넘어 관객들에게 단호한 선택을 요구한다. 관객은 감정의 고조를 넘어서서 단호한 정치적 입장을 요구하는 논리로 이끌려 가게 된다. 물론 그는 이 오뎃사 계단 장면 뿐만아니라 많은 장면에서 여러 대의 카메라를 설치해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크기로 쇼트들을 찍었다. 그는 찍힌 것을 어떻게 편집하느냐가 영화 창작의 처음이자 출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전함 포템킨>은 이렇게 포템킨호의 선상 반란에서 시작하여 오뎃사 계단 그리고 마지막 승리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쇼트도 낭비하지 않으면서 영화를 끌어간다. 서구 무성영화 특유의 지루하고 나른한 느낌은 이곳에서 찾을래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몽타주이론에 대한 비판 역시 만만치 않았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1929) 등에 대한 비판은 끝없이 이어졌고 그는 자신의 몽타주론을 완성하기 위해 낮에는 소련영화학교의 강단에서 밤에는 연구실에서 일했다. 급기야 그는 형식주의자로 매도당했고 어떤 영화는 정부에 의해 제재를 당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위대한 사회주의'를 믿었지만 그것을 온순하게 따르는 멍청한 예술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형식을 연구하는 사람을 형식주의자라고 한다면 매독을 연구하는 사람은 매독주의자다'라고 항변했다.

결국 <전함 포템킨>은 소련 영화의 명예로 남아 있을 뿐 자신의 조국에서는 이어지지 않았다. 또 그의 독특한 인물 전형화론 등의 이론은 이제 후학들의 과제로만 남아있다. 역설적으로 그의 몽타주 기법과 사회의식은 1930년대 영국의 사회적 다큐멘터리로 전수되었다.

<소설가 조성기 영화에 빠진날> 조성기 저서에서 발췌


1. 몽타주는 원래 ‘조립(組立)하는 것’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이다. 영화는 촬영되는 것이 아니라 조립되는 것, 다시 말해서 원래 따로따로 촬영된 필름의 단편을 창조적으로  접합해서 현실과는 다른 영화적 시간과 영화적 공간을 만들어 거기에 새로운 현실을 구축하여 시각적 리듬과 심리적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데서 영화의 예술성이 성립된다고 보고 그 방법을 명확하게 하려는 이론이 몽타주이론이다.

2. 프랑스의 무성영화 이론과 미국의 그리피스 등의 실험작품들을 세밀히 연구해서 이론을 체계화시킨 것은 러시아의 S.M.에이젠슈테인, 프도프킨 등이다. 1920년 그들은 많은 논문과 저서를 발표해서 보급에 힘쓰는 동시에 자작 "전함 포템킨"(1925, 에이젠슈타인) "어머니"(26, 푸도프킨) 등을 통하여 훌륭한 실천을 보여 주었다.  ‘흡인(吸引)의 몽타주’ ‘상극(相剋)의 몽타주’ 등 특히 에이젠슈테인의 개성적인 제창이 중요시되었고, 무성영화시대에는 이 이론이 전(全)영화이론의 골격을 이루었다. 유성영화로 넘어오는 변혁과정에서도 지도적 구실을 하게 된 것은 음(音)과 화면과의 고차적인 ‘조립’을 명시한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이론(유성영화에 관한 선언)이었다.

세르게이 M. 에이젠슈타인 (Sergei M. Eisenstein)
출생 : 1898년 01월 23일
사망 : 1948년 02월 11일
성별 : 남
출생지 : 라트비아
다른이름 : 세르게이 M. 아이슨스타인

1  폭군 이반 2부(Ivan Grozny II / Ivan The Terrible, Pa) 1958년 소련(구)
  별칭 : <Boyarsky Zagovor>
  비디오 출시명 : <폭군 이반>
  TV방영명 : <이반 대제 II> EBS 세계의명화
2  폭군 이반 1부(Ivan Grozny I / Ivan The Terrible, Par) 1944년 소련(구)
  비디오 출시명 : <폭군 이반>
  TV방영명 : <이반대제 1> EBS 세계의명화
3  알렉산더 네브스키(Aleksandr Nevsky / Alexander Nevsky) 1938년 소련(구)
4  10월(Oktiabr / October) 1927년 소련(구)
  별칭 : <Ten Days That Shook the World>, <세계를 뒤흔든 10일>
5  파업(Stachka / Strike) 1925년 소련(구)
6  전함 포템킨(Bronenosets Potemkin / The Battleship Potemkin) 1925년 소련(구)

https://m.blog.naver.com/kdi062/120009494127

전함포템킨.Battleship Potemkin.1925.1080p.BW

https://youtu.be/OoX3B2HEQLc
전함포템킨.Battleship Potemkin.1925.BW Photo-Image
전함포템킨.Battleship Potemkin.1925.BW Photo-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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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eisme.skymoon.info/article/SuggInfo/358  

만남의 횟수만큼 헤어짐의 숫자들이 있습니다. 덜 한 것도 없고 더 한 것도 없습니다. 세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늘-만남과 헤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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