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플래닛.Fantastic Planet.1973

판타스틱 플래닛은 르네 랄루의 첫 번째 장편애니메이션으로, 단편 시절의 테마(거대 괴물의 공격을 다룬 <달팽이들>)와 형식미(펜 드로잉이 두드러진 <데드 타임즈>)를 결합한 것이다.

CG 기술이 하이퍼리얼리즘까지 허락한 이즈음, <판타스틱 플래닛>과의 만남은 낯선 충격으로 다가온다.

애니메이션이라기보다는 중세풍의 삽화집처럼 보이는 <판타스틱 플래닛>은 3년 반 동안 종이에 일일이 손으로 그려넣어 완성한 페이퍼애니메이션으로, 모던한 CG애니메이션이나 전통적인 셀애니메이션과 달리 회화적인 터치가 생생하다.

브라운과 블루 컬러의 붓 터치, 세밀한 펜선이 두드러지는 그림체는 SF판타지의 초현실적인 분위기와 잘 어우러져 있다.

트라그들이 명상을 통해 유체 이탈하는 모습이나 크리스털이 꽃처럼 피어나다가 휘파람에 깨지는 장면은 신비롭고 몽환적이며, 신체 부착 무기처럼 쓰는 전투 괴물, 그리핀과 개미핥기가 합체된 괴물 등의 단역 캐릭터들에도 범상치 않은 시각적 상상력이 엿보인다.

이 작품을 "사이키델릭하다"고 정의한 한 평자는 "르네 랄루와 롤랑 토포르는 작업 당시 환각상태였을 것이다"라는 가설로 에둘러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완성하기까지 꼬박 3년 반이 걸렸다는 <판타스틱 플래닛>은 1973년 세상에 나와, 애니메이션으로는 최초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바 있다.

놀라운 것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SF적 상상력이 진부하거나 유치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전'의 명성에는 다 이유가 있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23799


판타스틱 플래닛 (The Fantastic Planet)

어릴 적 내가 살던 집의 마당에는 항상 개미가 기어다녔다. 대문을 열고 오르는 계단에 앉아서 열심히 움직이는 개미에게 사탕을 뱉어주기도 하고 연필 끝으로 눌러서 죽이기도 했다.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말이다. 르네 랄루(René Laloux)와 롤랑 토포르(Roland Topor)의 1972년 작 <판타스틱 플래닛(La Planète sauvage)>의 도입부를 바로 떠오르는 것이 이 것이었다. <판타스틱 플래닛>에서 트라그들이 옴들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 벌레나 작은 동물들이 만약 인간과 같은 형상이었다면 정말로 그렇게까지 못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트라그와 옴은 모두 인간과 유사한 형상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옴은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고 트라그는 인간을 기초로 해서 흔히 상상하는 외계인의 모습을 따왔다. 하지만 옴은 지금의 우리의 문명보다는 떨어진 원시적인 모습이고 트라그는 매우 발달한 문명을 가진 (마치 과학의 발달로 인해 움직임이 둔해진 사람들을 묘사한 듯 보인다) 종족이다. 게다가 옴의 시각에서는 마치 거인처럼 큰 체구를 가지고 있다. 이런 크기의 차이에서도 느껴지듯이 옴은 트라그에게 대적할만한 상대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옴들은 자신들의 15년이 트라그족의 3계절이기 때문에 더욱 빨리 종의 개체수를 늘일 수 있는데다 그들의 과학기술을 습득한다. 그리고 그들의 약점을 발견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상황은 역전되고 그 일로 인해 두 종은 전쟁이 아닌 평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판타스틱 플래닛>은 이런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있어 무척이나 허술한 점을 보인다. 주인공격인 테르는 트라그에 의해서 어렸을 적부터 길러졌으나 어떠한 과정도 없이 옴들의 말을 처음부터 알아듣고 말한다. 트라그의 문자가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키워드인 것을 본다면 이는 명백한 스토리상의 구멍이다. 이런 결점들에도 불구 하고 이 작품이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것은 미술과 세계관의 표현이 높이 평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말했듯이 <판타스틱 플래닛>의 작화는 상당히 회화적이다. 일본의 셀 애니메이션의 작화가 디자인에 가깝다면 <판타스틱 플래닛>은 예술에 가깝다. 두 작품 사이에는 의도가 다른 것이다. <판타스틱 플래닛>은 제작년도를 충분히 감안해서 보더라도 확실히 애니메이팅이 떨어진다. 움짐임은 극히 부분적이고 또한 비중이 적다. 이것은 <판타스틱 플래닛>를 페이퍼 애니메이션으로 작업할 때 분명히 감안을 하고, 움직임보다는 회화적 표현에 중점을 두고 제작 한 것이다. 그리고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은 움짐임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다량의 프레임을 사용하고 또 이를 위해 다수의 인원이 참여하며 이에 알맞은 셀 애니메이션으로 작업했다. 그리고 두 작품은 대전의 승전국과 패전국의 시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 그런 영향이 있다 하더라도 각각의 독자적인 세계관으로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두 작품의 우위를 논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판타스틱 플래닛>이 칸에서 상을 타고 예술성을 인정 받는다 하더라도 많은 대중은 미야자키의 작품을 즐겨본다. 그렇다고 미야자키의 작품이 단지 오락성으로 가득한 수준의 작품이 아니란 것은 이미 다 인정하는 사실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역시 베를린 영화제에서 보란 듯이 금곰상을 수상하지 않았는가.

<판타스틱 플래닛>이 여러 가지 해석을 낳을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이야기의 결말은 전쟁이 아닌 평화적 교류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모티브가 어떻게 되었든지 이 작품은 작가의 생각과 사상을 담고 있으며 이미 지나간 역사에 대한 기록이 아닌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담은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이 이야기가 옳은 것이고 모두가 동의할 것임을 의심하지 않지만 내용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너무나 긴장감이 떨어지고 또한 대충 결론을 맺어버린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극적인 구조의 부실함은 이야기의 절반이나 할애한 테르가 다시 옴족의 일원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나머지 절반인 옴족에서 트라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게 되기까지를 열심히 보아온 관객에게 배신하듯이 서둘러 끝나버린다. 그렇다고 여운을 남겨서 결론을 유추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너무나 잘정리해서 결론을 나레이션으로 이야기 해주고는 끝나 버린다. 묘한 배신감이 드는 것은 본인만은 아닐 것 같다.

<판타스틱 플래닛>이 30여년이 지난 지금에 보아서도 아름다운 비쥬얼을 제공함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스토리의 허술함과 단순한 내러티브는 이 시간을 초월하기에는 역부족해 보인다. 게다가 둔한 움직임과 지금은 흔해빠진 환타지는 요즘의 관객들을 빠져들게 하기에는 너무 고리타분해 보인다. 작품이 애니메이션의 역사적으로 또는 기법상의 맛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있어 보이고 높이 사야 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30년을 건너뛴 시점에서 큰 공감대를 얻기에는 아니 그것보다는 오히려 관객의 집중을 얻어내기에는 확실히 많이 부족해 보인다.

<반딧불의 묘>를 보고 많은 한국인들은 일본이 피해자인 것으로 묘사 된것에 대해 인정하기 싫어했다. 하지만 분명히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피해자였다.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피해를 당했고 전쟁이 끝나기만을 바랬다. 또한 그런 시선에서 만들어진 작품일 뿐인데 일본 작품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가해자로서의 성찰을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일본이 피해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 살던 사람들이 피해자라고 말할 뿐이다. 이것이 <판타스틱 플래닛>이 알제리와 프랑스의 관계로 해석이 되고 또한 이 점에서 가해자인 프랑스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로서의 반성적 시각이 담겨있다고 해서 모든 일본의 작가가 그러한 표본을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또한 해석이 다양하게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해석을 들어서 이러한 시각을 담은 작품이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는것이다. 어떻게 해석하자면 르네랄루는 체코인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피해자의 입장을 얘기했다고도 할 수 있으니깐 말이다. 게다가 옴이라곤 해도 신이나 티와는 테라가 죽지않게 하기위해서 애완용으로 기른것이다. 이러한 세부상황들은 본다면 트라그들은 그저 옴들이 작고 애완동물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트라그들은 옴들이 해롭기 때문에 잡고 있는것이다. (물론 이것이 잘못된 생각임은 후반에 깨닫지만 인간이 바퀴벌레를 잡는것과 다를 바 없다. 바퀴벌레도 우리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관객들이 옴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것은 단지 시각(관점)이 아니라 옴들의 형태에 더많은 비중이 있을것이다. 앞서 나의 경험을 얘기했던것처럼 만약 개미나 모기가 사람과 같은 형태라면 해치지 않을거라고 말이다. 이렇게 옴들을 인간의 형태이자 피해자로 묘사한 것은 작가가 피해자의 입장에서 작품을 그렸다고 해석하는게 더 나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분명히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회화작품과는 다르다. 움직임에 그 중심이 있는것이고 다른 비쥬얼을 이 움직임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이지, 그림에 움직임을 주어서 전체그림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점에서 <판타스틱 플래닛>은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있어서도 그렇게 치밀하지 못한 이 작품은 분명히 지금의 작품들과는 비교를 할 수가 없다. 하지만 <판타스틱 플래닛>에는 지금봐도 참신한 이미지가 담겨있고 확실한 작가의 의도가 느껴지며 관객이 자신을 반성하고 생각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다. 또한 애니메이션사 적으로도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렇게 이 <판타스틱 플래닛>은 하나의 ‘작품’으로서 충분히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오는 감각은 역시 무뎌지고 ‘상품’으로서의 가치는 떨어짐이 분명하다. 때늦은 개봉이 아마도 르네랄루의 사망으로 인한 것인지는 몰라도 30년의 세월을 극복하기에는 조금 역부족이었지 않나 생각된다. 이미 깔끔한 셀과 정교한 3D에 길들여진 관객에게 이 70년대 프랑스의 위대한 작품은 우아하기 보다는 답답해 보일테니 말이다.

참고
씨네21 http://www.cine21.co.kr/
      http://www.cine21.co.kr/kisa/sec-002100100/2004/04/040413140856084.html
      http://www.cine21.co.kr/kisa/sec-002100100/2004/04/040413142456086.html

ALLOCINE.COM http://www.allocine.fr
        http://www.allocine.fr/film/casting_gen_cfilm=858.html

엔키노  http://www.nkino.com
        http://www.nkino.com/Movies/movie.asp?id=10552

시네서울 http://www.cineseoul.com

네이버영화 http://movie.naver.com/

IMDB  http://www.imdb.com/

판타스틱플래닛 국내홈페이지 http://cinecube.net/cine/fantastic/

필름2.0 174호 (2004.04.13) 82P - 애니메이션의 고전이 될 수 있는 조건 (이상용 영화평론가)

http://egloos.zum.com/unknownn/v/3590960

판타스틱 플래닛.Fantastic Planet.1973.720p

영화 리뷰 : https://youtu.be/8mB-c6YkROU
판타스틱 플래닛.Fantastic Planet.1973 Photo-Image
판타스틱 플래닛.Fantastic Planet.1973 Photo-Image
판타스틱 플래닛.Fantastic Planet.1973 Photo-Image
판타스틱 플래닛.Fantastic Planet.1973 Photo-Image

https://heisme.skymoon.info/article/SuggInfo/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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